백운컬럼94 평상심 | 운영자 | 2025-05-2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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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창업한 이병철 회장은 대기업을 경영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수도 없는 공격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후계자인 이건회에게 목계(木鷄)의 가르침을 전헀다. 나무로 깍아 만든 닭인 목계 이야기는 장자(莊子)의 달생(達生)편 ‘닭싸움’에 나온다. 주나라 설왕은 기성자(記性子)라는 당대 최고의 싸움닭 훈련자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길러내라는 명을 내리고 열흘 후에 기성자에 결과를 물어보니 “강해지기는 했으나 아직 교만합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20일 후에 물으니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 쉽게 반응합니다.”라고 했다. 30일 후에 물으니 “조급함은 버렸으나 눈초리가 매서워 감정이 다 드러납니다.”라고 했다. 다시 열흘이 지난 후에야 기성자는 마침내 싸움닭을 왕에게 바치며 “이제 멀리서 보면 나무로 깎은 닭처럼 덕이 있고, 초연해 보입니다. 다른 닭들은 보기만 해도 달아날 것입니다.” ‘나무닭’은 자신의 힘을 자랑하여 드러내지 말고, 아무리 약한 적이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으며, 상대가 싸움을 걸어와도 초연한 마음으로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의미다. 이건희 회장은 일마다 때마다 일일이 맞대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삼성을 지켜 낼 수 있었다. 평상심은 산을 보고 산인 것을 알고 물을 보고 물인 것을 아는 단순한 마음이요, 순조로운 상황일 때, 답답하고 어려운 상황일 때 태연할 수 있는 능력이다. 평상심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험하고 굴곡진 인생의 여정에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수많은 돌부리와 장애물을 헤쳐 나아가는 지혜요 방편이 아닌가 싶다. 평상심은 불교 최초의 경전 숫파니타파(Sutta Nipata)에 나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그렇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가르침을 요구한다. 구름 위로 치솟아도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 태산처럼, 온갖 물줄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깊이를 드러내지 않는 바다처럼, 자랑도 과시도 없는 겸손하고 온유한 삶의 태도를 말한다. 물병과 콜라병을 양손에 쥐고 흔들면 물병은 흔들어도 여전하여 변동이 없다. 하지만 콜라병은 마구 끓어올라 뚜껑을 열면 솟아 넘친다. 똑같은 환경에서도 콧노래를 부르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하루종일 얼굴을 찌그리고 짜증을 내는 사람들도 있다. 명나라 홍자성(洪自誠)의 채근담에 나오는 “영화와 욕됨을 놀라지 않으며 한가롭게 뜰앞의 꽃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가고 머무는 것에 뜻을 두지 않고 무심히 하늘의 구름이 일고 스러짐에 따른다,” 는 글을 좌우명으로 삼는 이들이 많다. “잃은 것과 얻을 수 없는 것들을 평상심으로 대하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의 안문(安文)이 쓰고 황보경이 번역한 ’나를 지키는 지혜 평상심‘에 실린 이 글을 읽으면 나는 마음에 평안이 가득 차오는 것을 느낀다. 어느 사찰 기둥에 세로로 써 붙인 글(주련 柱聯)에 “높은 곳에 서고, 평평한 곳에 앉으며, 넓은 곳을 향해 가라.”는 글을 읽고 어느 분이 해석하기를 “ 높은 곳에 서라는 것은 부분이 아닌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높은 곳에서 문제를 보라는 뜻이며, 평평한 곳에 앉으라는 것은 사람을 대할 때 평안하고 공정한 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며, 넓은 곳을 향해 가라는 것은 무슨 일을 하거나 열린 마음으로 융통성을 가지라”는 글을 읽었다. 그렇다. 산이 얼마나 높은가를 알려면 낮은 들판에서 올려다보아야 하고, 들판이 얼마나 넓은가를 알려면 높은 산에 올라가 아래로 바라보아야 알 수 있듯이 평상심은 현실의 문제를 상하좌우의 중심에 서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무게 균형을 잡는 것이다. 제갈량이 아들을 위해 쓴 계자서(誡子書)에 “담박한 마음으로 뜻을 밝히고 고요한 마음으로 멀리 내다보라(淡泊以明志 寧靜以致遠)” 는 글이 평상심을 말하고 있는 아닌가 싶다. 그렇기는 하여도 평범하고 담담하게 마음 가는 대로 산다는 것은 쉽지 않고, 마음을 담담하고 고요하게 다스리기란 더욱 쉽지 않다. 우리가 걸어야 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여정 앞에는 상처를 주는 수많은 돌부리와 장애물이 놓여 있다. 그렇다고 마음의 평정을 잃고 고통 속에 빠져 나날을 보낼 수는 없다. 에디슨은 수백만 달러에 달하는 실험실이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을 때 가족과 지인들이 모두 하나같이 절망에 빠졌지만 에디슨은 달랐다. “실험실은 다시 지으면 된다.”라고 마치 남의 일처럼 말했다. 우리가 배워야 할 에디슨과 같은 초연함이란 마음속에서 들끓는 걱정이나 불안감, 번뇌 등을 흘러가는 강물이라 생각하고 강 옆에서 그 강 속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평상심을 유지하는 자세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얻지 못할 것을 내려놓고 이미 잃은 것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평상심으로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아끼는 것이다. 평상심은 낙담이나 실의에 맞서는 심리적 용기다. 어떤 선사(禪師)에게 세 명의 제자가 있었다. 어느 날, 선사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대문 밖에 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한 그루는 싱싱하고 한 그루는 시들었다. 너희는 어느 나무가 좋으냐?” 첫 번째 제자가 대답했다. “싱싱한 나무가 좋습니다.” 두 번째 제자가 대답했다. “시든 나무가 좋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제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싱싱한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고, 시든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이니 저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선사는 과연 어느 제자의 대답을 흡족하게 생각했을까? 중국 작가 쑤쑤의 ’인생을 바르게 보는 법, 놓아주는 법, 내려 놓는 법‘에 나오는 글이댜. 위의 선문답은 모든 걱정과 근심은 ‘사람 때문에’ 생기는 번뇌로 인간관계에서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고 침착하게 평상심을 유지하고 이해득실과 상관없이 평온한 마음가짐을 유지한다면 수많은 번뇌와 근심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이다. 또한 순탄하지도 않은 인생길에는 기쁠 때가 있으면 슬플 때가 있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 험하고 굴곡진 인생길에는 언제나 우여곡절이 많아서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기든 크게 놀라지 말고 평상심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중국 춘추 시대 진입부(陳立夫)라는 95세 노인은 장수비결을 묻는 이에게 “신체를 단련하는 것은 몸을 움직이는 데(운동)에 있고, 마음을 닦는 데는 고요함(평상심)에 있다고 하였다. 새가 하늘을 날려면 두 날개가 있어야 하듯이 사람의 건강한 장수를 위해서는 신체적 건강을 위한 운동과 함께 마음의 건강을 위한 평상심이 요구된다는 가르침이다. 새는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아래쪽에서 움직이는 먹이를 발견할 수 있고, 사람은 머리를 숙일 줄 알아야 높은 산 정상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을 잘 알고 있지만 이를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너그러운 아량으로 상대의 잘못이나 오해를 따지지 않고 웃어넘기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좋은 생활 습관을 길러야 평상심을 지킬 수 있다. 내가 철이 들어 40을 넘기면서 올바른 삶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타인에 대한 선한 마음과 공경하는 마음을 중히 여겨 왔으나 여전히 부족하여 평상심을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현악기 연주와 같아서 줄이 너무 팽팽하면 끊어지고 느슨하면 제대로 소리가 나지 않는 것과 같아서 중도를 지키는 것이 바로 평상심의 근본이라고 하니 이 세상을 평상심으로 헤쳐나가기를 기대합니다. 백운 이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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