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컬럼75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 | 운영자 | 2024-12-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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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열정적이고 이상과 신념에 넘친 인간성을 소유한 사람이 있다. 명지대학교 겸임교수로 청소년복지를 강의할 때 만난 교수님 한 분은 항상 긍정적이고 생각이 건전하고 행동이 명쾌하며 늘 미소가 얼굴에 가득하여 뵐 때마다 산소 같은 교수님이라고 부러워했던 분이셨다. 로버트 콘크린(Robert Conclin)은 인긴성(人間性)을 만들어내는 토대는 사고, 행동, 감정이며, 나에게 방해가 되는 껄끄러운 사람이 있다면 먼저 그런 사람을 대하는 나 자신의 마음가짐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동일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시각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생각의 차이는 결과의 차이를 가져온다. 자신 생각만 고집하는 사람을 고집불통이라 하지 말고 신념이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성을 잘 내는 사람을 참을성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이 풍부한 사람으로 생각해주고, 너무 꼼꼼하여 일이 느려터진 사람을 사려 깊은 사람으로 우리의 시각을 바꿀 수 있다면 가정과 직장과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시각에는 사물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기본적 자세를 의미하는 시각(時角)과 사물을 보는 감각을 뜻하는 시각(始覺)이 있다. 시인 프레드릭 렝브리지는 말한다. “두 사람이 똑같이 창살을 통해서 밖을 내다본다. 한 사람은 진흙땅을 내려다보고 한 사람은 별이 빛나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인생의 광야길에서서 한 사람은 쳇바퀴 같이 반복되는 세상 사는 일에 매달리고, 한 사람은 장차 올라갈 하늘나라를 본다. 상황은 같으나 시각(時角)은 다르며. 보이는 것(始覺)은 같으나 관점이 다르다. 자신이 다니는 직장에 대해 어떤 이는 하늘이 주신 부름을 받은 일터라고 생각하고 감사와 열정을 다하지만, 어떤 이는 왜 하필이면 이런 직장이냐고 불만과 불평으로 나날을 허비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각이다. calling을 직장이라고 하는 데 이 말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뜻도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기독교아동복리회(초록우산 어린이재단)에 들어가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펴는 후원자와 도움이 필요했던 소년소녀가장을 연계하는 번역업무를 시작했을 때 이 일이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고, 그 감사와 보람을 나는 55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간직하고 있다. 하나의 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사실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생각이나 경험을 통해 왜곡하여 판단하기 쉽다. 김훈은 소설 ‘칼의 노래’에서 노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이 병사들에게 “본 것만 말하고, 들은 것이 있으면 들은 것만 이야기하고, 들은 것도 본 것도 없으면 그때 너의 생각을 이야기하라.”고 당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시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모든 것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결론 내리고 행동하고 그 행동이 옳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자기만의 렌즈를 갖고 있으며, 객관적인 모습보다는 주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신의 렌즈에 의해 실제인 것처럼 믿는다고 말했다. 우리의 고착된 시각은 바꿔져야 하며, 그 시야는 넓어져야 하고, 방향은 미래를 보는 것이어야 한다. 타조의 시력은 인간 시력인 2.5의 10배기 넘는 25에 이르지만 시야가 좁아 전방 일정 거리만 볼 수 있고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못해서, 먼 곳에 낭떠러지나 함정이 있는지도 모르고 앞으로만 달리다가 낭패를 보기 쉽다. 반면에 독수리는 높은 하늘에서 멀리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지고 있다. 사과 하나에서 몇 개의 씨가 있는가를 살피는 시력도 중요하지만 한 개의 씨를 심어 훗날 얼마의 사과를 수확할 수 있는가를 꿈꾸는 시야의 넓이도 필요하다. 뉴턴이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를 관찰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였고, 갈릴레오는 성당의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보며 지동설을 확신했고, 갈릴레오가 지평선을 보고 지구는 둥글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듯이, 그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시각에서 보고, 일반인들이 황당하다고 비웃던 자신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추구했다. “눈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오는 그건 아마도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는 김윤아 노래 ‘봄날은 간다’의 일부다. “눈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강 지금도 흘러가는 가슴속의 강”은 남상규의 ‘고향의 강’ 첫 소절이다. 시각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는 방법으로 눈을 감고 감각 기능을 넓혀 보는 것이다. 수년 전 갑자기 오른쪽 시력이 떨어져 찾아간 어느 안과병원에서 습성황반변성으로 실명을 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고,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눈을 가리고 남몰래 4층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내려 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 안과의 진단은 오진이었지만 눈을 가리고 걸어보니 손과 발의 감각이 확장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볼 수 있다면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확인하거나, 보이지 않거나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고 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거나 한발 물러서서 상황을 객관화해보는 훈련이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시각을 달리하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옛날에 짚신 장사를 하는 큰아들과 우산 장사를 하는 둘째 아들과 함께 사는 어머니가 있었는데 늘 근심 걱정이 없어 보였다. 이웃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그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비가 오는 날에는 둘째가 우산을 많이 팔고, 개인날에는 첫째가 짚신을 많이 팔 수 있으니 날이 맑으면 맑아서 좋고 날이 흐리면 비가 와서 좋다고 말했다. 우리들 인생도 살다 보면 맑은 날도 있고 비오는 날도 있다. 우리의 시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시각의 소유자가 될 수도 있고, 만사에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실패자가 될 수도 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대상을 판단하거나 어떤 것에 확신이 없을 때 시각에 의존하는 능력을 키워왔다. 영어의 see가 ‘본다’는 말이지만 ‘안다’는 말이기도 하다. 확신이 없을 때는 “네가 봤냐.”라고 한다. Seeing is believing처럼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 서구에 비해 우리나라는 시각보다 청각을 중요시해왔다. 영어로 “나는 안다”고 할 때 “Yes, I see”라고 하지만 우리는 “너도 들어서 알지?”라고 한다. “말을 잘 안 듣는다”, “말귀가 어둡다”라고 말하는 우리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에서 사물을 이해하려고 한 것 같다. 박종홍 교수는 논문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에서 ‘보는 것’은 로고스(Logos) 적인 것이며 ‘듣는 것’은 파토스(Pathos)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서구의 눈의 문화는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능동적인 로고스이며, 이에 반해 우리의 귀의 문화는 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직감적이고 수동적인 파토스라고 하였다. “남대문을 가본 사람과 안 가본 사람이 다투면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 는 옛말은 시각보다 청각을 우선해왔음을 알 수 있다. 사물과 상황을 주로 현미경으로 보느냐 망원경으로 보느냐의 시각의 범위와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보느냐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보느냐의 시각의 관점의 차이에 따라 현재와 미래를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생은 결정된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는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시각이며,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만 갈 것인가 아니면 나만의 길을 만들어 갈 것인가 결정하는 판단의 기준이 될 것이다. 백운 이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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