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컬럼74 세월에 대하여 | 운영자 | 2024-12-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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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독수리에 대한 예기가 있다. 심각한 상처를 입은 어린 독수리들이 벼랑으로 모여들었다. 날기 시험에 낙방하고, 동료에게 따돌림을 받고, 힘센 독수리에게 공격까지 받아 상처 입은 어린 독수리들이었다. 그들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다며 절망하고 있을 때 파수를 보던 영웅 독수리가 내려와서 그들 앞에 자신의 날개를 펼쳐보이며 여기저기 찢긴 상처를 보여주며 말했다. “이건 날기 시험을 볼 때 추락하여 찢긴 것이고, 이건 왕 독수리가 할퀸 자국이다. 그러나 이것은 밖에 드러난 상처에 불과하다. 마음의 빗금 자국은 헤아릴 수도 없단다.” 이어서 영웅 독수리는 타일러주었다. “일어나 날아보자. 상처 없는 새들이란 태어나자마자 죽은 새들뿐이다. 살아가는 우리 중에 상처 없는 새가 어디 있겠니.” 어느 분의 책에서 읽은 ‘좋은 글’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와 같다. 사실 상처 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직장의 상하와 동료 간에, 부부와 부모 자녀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안고서도 꿋꿋하게 자기의 길을 지켜 나아간다. 어떤 이들은 자기 상처를 안고서도 오히려 남의 상처까지 감싸고 돌보면서, 험난한 세상의 파도를 함께 헤쳐 앞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한 해를 보내며 이 한해 알게 모르게 받은 몸과 마음의 상처를 저물어 가는 세월에 묻고 새 해에는 창공을 마음껏 비상하는 우리 모두가 영웅독수리가 되었으면 한다.
옛 어른들은 세월은 유수(流水)와 같다고 했다. 제갈량은 자식에게 주는 계자서(誡子書)에서 나이는 시간과 함께 내달리고 뜻은 세월과 함께 사라져(年與 時馳 意與歲去) 달리는 수례처럼 빨리 지나간다. 우리의 의지와 생각은 나이가 들면 게을러지고 타락하여 용기가 없어진다고 했다. 도연명도 청춘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盛年不重來), 하루에 새벽은 한번 뿐이다(一月難再晟)라 하였다. 서양에서도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Time and tide wait for no man) 하여 세월을 아끼라고 충고하였다. 우리는 세월이 빨리 흘러간다고 한다. 기차를 타고 가면 나는 가만히 있는데 산천 수목이 다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사실 가는 것은 내 자신이며 산과 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세월도 이와 같아서 시간이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늙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점(點)처럼 살아가고 역사는 선(線)처럼 이어간다는 말을 나는 좋아한다. 점과 점을 이으면 선이 되듯이 그가 지나온 시간과 시간이 모인 것이 그의 인생이다. 나는 상담심리학 첫 시간에 수강생 모두에게 백지 한 장을 나눠주고 자신이 태어난 집을 그려보고 그 집의 어느 곳이 가장 힘들고 마음이 아팠었을 때 피난처로 기억되고 있는지를 물어본다.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니 내가 어느덧 80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세월에 떠밀려 여기까지 왔고 지금도 어쩔 수 없이 앞을 향해 발길을 옮기고 있다. 돌아보면 안개 짙은 벌판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한 한 갈래 길이 보인다. 먼 길의 끝에는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하는 높다란 대청마루와 부엌이 달린 왼쪽 안방과 오른쪽 방에서 난간으로 이어진 방들과 대문이 따로 붙어있던 사랑방이 보인다. 뒷 뜰에 큰 감나무와 디딤방아 그리고 채마밭이 이어졌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미곡동 마을 입구에 있던 지금은 마을회관이 들어선 내 생가의 기억이다. 네 살 때쯤 어느 가을날 저녁 온 가족이 식사를 하는 데 밥뚜껑을 열어보니 내가 싫어하던 조밥이 가득하였고 흰쌀밥을 달라고 떼를 쓰다가 부친한테 야단을 맞고 억울한 마음에 밥도 안 먹고 할아버님이 계시던 사랑방으로 달려간 손자를 끌어안아 주시며 머리를 쓰다듬으시던 할아버지의 사랑방은 내 마음의 안식처로 남아있어 수많은 세월의 강을 넘어 몸과 마음의 아픈 상처를 달래주며 다시 일어서는 버팀목과 비빌 언덕이 되고 있다.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은 인생을 살면서 누구에게나 익숙한 지혜가 되었다. 프랑스 시인 라 퐁텐은 말했다. “슬픔은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발자국과 같다. 뒤돌아보니 저 멀리 걸어온 발자국이 희미해진 것처럼 세월이 흐르면 슬픔도 옅어지기 마련이다. 슬픔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으며, 슬픔을 달래는 가장 좋은 약은 시간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남들에게 내놓을 변변한 자랑거리는 없지만 나는 맞서서 부딪치기보다는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방향으로 살아왔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삶을 적극적이고 직선적이 아닌 수동적이고 곡선적인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은 늘 내 앞에 벽을 만드는 것과 동시에 길을 만들어주었고, 그 안에서만큼은 나의 의지로 나의 길을 결정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 누구나 선택의 결과를 다시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선택은 살아온 경험과 겪어온 세월에 따라 휘둘리거나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괴테는 언제나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싶다면 나이가 나를 떠나게 하라고 강조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늙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세월이 흘러 주름이 생겨도 언제나 어린아이의 가슴으로 살아야 한다. 어린아이의 가슴으로 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를 잊는 것이다. 지금 내가 있는 이 곳(here and now)이 중요하며, 세월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卽時現今 更無時節). 영국 신사도(Gentleman ship)의 모범으로 알려진 필립 체스터필드(Philip Chesterfield)는 그의 아들에게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는 말을 남겼다. 인생은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희극이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비극이라고 한다. 지나온 어제가 빛나는 내일이 되려면 우리는 오늘을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자작시 ‘세월’을 보냅니다. 세월 누가 말했나 불지 않으면 바람이 아니고 늙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고 가지 않으면 세월이 아니라고 서리 내린 머리 위에 흰 눈은 쌓여가고 한정 없이 흐르던 강물도 끝이 보이거늘 초겨울 산 그늘은 길어 서산에 아직 해 걸려있거늘 동산은 벌써 어둠으로 덮여 가네 세월 가면 바위도 부서지고 산도 무너져 부서진 바위는 흙이 되고 무너진 산은 들판 되어 물결치거늘 월간 문학세계 등단 시인 백운 이배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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